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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곤평 싸움 : 칠백의사

조헌(文烈公 重峯 趙先生)

이름은 헌이며 호는 중봉, 명종(明宗) 2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선조(宣祖)때 유학자로 정주교수(定州敎授)를 거쳐 질정관(質正官), 호조와 예조의 좌랑, 사헌부 감찰, 통진현감, 공주제독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율곡(栗谷)등 어진 선비와 깊이 사귀고 사리밝은 정론과 과감한 시책으로 시정을 바로 잡기에 힘썼다.
그른 일에 굽힐줄 모르는 극론(極論) 으로 인하여 반대파의 미움을 사 때로는 파직되거나 유배당하기도 했다.
남다른 선견지명이 있어 정여립(鄭 汝立)의 모반과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대궐에 엎드려 국방강화와 시정의 개선을 극간(極諫)하였으나, 조정에서는 그의 뜻이 광론(狂論)이라 하여 받아 들이지 않았다.
벼슬을 떠나 옥천에 은거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의 보은(報恩) 진격을 저지하고, 영규대사의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淸州)를 탈환하였다.
이어서 금산의 왜적이 호서·호남지 방을 석권할 기세임을 듣고 영규대사와 합세, 칠백의사를 이끌고 금산의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셨다. 후에 나라에서는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열의 시호를 내렸으며, 문묘과 금산 종용사 및 옥천 표충사 등에 모시고 있다.

영규대사(靈圭大師)

승병장 영규대사는 속성은 박(朴)이며 호는 기허당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제자로 공주 갑사(公州甲寺) 청련암(靑蓮庵)에서 수도 하였는데 선장(禪杖)으로 무예를 연마 하여 신력(神力)있는 그의 재능을 따를 자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천명의 승군을 이끌고 의병장 조헌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탈환하니, 그 공으로 선조께서는 당상관(堂上官)의 벼슬과 단의(段 衣)를 내렸으나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시어 받지 못하였다. 공주갑사, 해인사 등에서도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이광륜(毅憲公 李先生)

이름은 광륜(光輪)이며 문소전참봉(文昭殿參奉)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군 4백명을 이끌고 조헌선생의 의병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탈환한 후 금산에서 싸우다 순절하시니 나라에서는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하고 의헌(毅憲)의 시호를 내렸다.

조완기(趙完基 趙公)

이름은 완기(完基)이며, 의병장 조헌선생의 아들로 금산싸움에서 아버지와 같이 순절하여 지평(持平)에 추증되었다.

조선생 막좌(趙先生 幕佐)

조헌선생을 따라 의병에 가담하여 금산 싸움에서 순절한 부장들인 바 봉사(奉事) 임정식(任廷式), 곽자방(郭自防), 선비 김절(金節), 이려(李勵), 박사진(朴士振), 김선복(金善復), 복응길(卜應吉), 신경일(申慶一), 서응시(徐應時), 윤여익(尹汝翼), 김성원(金聲遠), 조경남(趙敬南), 박혼(朴渾), 전충남(全忠南), 고명원(高明遠), 강몽조(姜夢祖), 만호(萬戶) 변계온(邊繼溫), 현감(縣監) 양응춘(楊應春), 주부(主簿) 정기용(鄭奇龍), 무인(武人) 김헌(金 ), 강충서(姜忠恕), 강인서(姜仁恕), 박봉서(朴鳳瑞), 김희철(金希哲), 정원복(鄭元福), 이인현(李仁賢), 김인남(金仁男), 이양립(李養立), 황삼양(黃三讓), 박춘년(朴春年), 한기(韓琦), 박찬(朴贊) 등으로서 이분들을 한 위패로 모시었다.

한응성(贈參議 龜窩韓公)

이름은 응성(應聖), 호는 귀와로 조헌선생의 제자이다.
임진왜란 때 가동(家童) 수십명을 거느리고 의병에 가담하여 금산 싸움에서 선봉장으로 용감히 싸우시다가 순절하시어 참의에 추증되었다.

길안수(贈承旨 吉公)

이름은 안수(安壽)이며 길재(吉在)선생의 5대손으로 아들 서춘(瑞春)과 함께 금산 싸움에서 조헌선생을 따라 순절하시어 승지에 추증되었다.

김형진(贈持平 石泉金公)

이름은 형진(亨進) 호는 석천이며 벼슬은 참봉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아들 정삭(廷朔)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금산싸움에서 조헌선생을 따라 순절하시어 지평에 추증되었다.

조선생 사졸(趙先生 士卒)

금산 싸움에서 순절한 이름 모르는 사졸들의 위패로 당시 향리의 사인(士人)과 관인 및 서인(庶人)들로서 조헌선생이나 그의 막하 부장들을 평소 따르던 사람과 그 집안에 관계했던 사람의 위패이다.

승장 사졸(僧將 士卒)

금산 싸움에서 순절한 영규대사 휘하의 이름 모를 승병들을 한 위패로 모시고 있다.

박사현(判官 退憂堂 朴公)

이름은 사현이며 호가 퇴우당이다. 조헌선생을 따라 의병에 가담했다. 청주싸움에서 중상을 입고, 금산 싸움에는 참가하지 못했으나 칠백의사가 모두 순절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통분하며 사망하셨다.

박중립(晩悟齋 朴公)

이름은 중립(中立), 호가 만오재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에 가담하여 조헌선생과 같이 금산싸움에 참가했다가 중상을 입고 살아남아 칠백의사의 시체를 거두어 의총을 만들었다. 후에 금산싸움에서 입은 창상으로 사망하셨다.

눈벌 싸움

고경명(忠烈公 霽峯高先生)

이름은 경명(敬命), 호는 제봉(霽峯)이며, 시문(時文)에 능하여 20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였고, 명종(明宗) 13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준재로 관직은 동래부사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60세의 노령으로 의병 7천여 명을 거느리고, 근왕코자 북상하다가 금산 눈벌 싸움에서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순절하시어, 예조판서에 추증되고 좌찬성에 가증되었으며 충열(忠烈)의 시호가 내리고 광주 포충사에도 모시고 있다.

고인후(毅烈公 鶴峯高先生)

이름은 인후(因厚), 호는 학봉이며 의병장 고경명선생의 아들로 벼슬은 성균관권지(成均館權知)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함께 금산 눈벌 싸움에서 순절하시어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추증되고, 영의정에 가증되었으며 의열의 시호가 내렸다.

류팽로(贈承旨 柳公)

이름은 팽로(彭老) 호는 월파(月坡)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학유(學諭)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선생의 종사관이 되어 금산 눈벌 싸움에서 순절하시니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안영(贈承旨 安公)

이름은 영(瑛) 호는 사제(思齊)이다. 고경명선생을 따라 의병에 가담하고 금산 눈벌 싸움에서 순절하시어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에 추증되고 좌승지로 가증되었다.

고선생 막좌(高先生 幕佐)

금산 눈벌 싸움에서 고경명선생과 함께 순절하신 이름 모를 부장들과 사졸들을 한 위패로 모시고 있다.

고선생 사졸(高先生 士卒)

의병장 고경명선생을 따라 금산 눈벌 싸움에서 순절하신 이름 모를 의병들을 한 위패로 모시고 있다.

한순(贈判書 韓公)

이름은 순(楯)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평양 판관을 거쳐 남평현감 재임시 임진왜란을 맞아 금산 눈벌 싸움 이후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절하시니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의장(毅將)의 시호가 내렸다.

횡당촌 싸움

변응정(忠壯公 邊先生)

이름은 응정(應井), 자는 문숙(文淑)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월송만호와 선전관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해남 현감으로 해전에서 공을 세워 전라수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했다.
금산 연곤평 싸움에 조헌선생과 협공을 약속했으나 이를 지키지 못했음을 부끄러워 하다가 선생의 순절 비보를 받고, 9일 후에 수십기 의병만으로 금산성에 돌격하여 횡당촌 싸움에서 순절하니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충장의 시호가 내렸다.

무명의사(無名義士)

임진왜란 당시 금산 싸움에서 돌아가신 이름 모를 분들을 한 위패로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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