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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강화 상소도
국방강화 상소도 이미지
조헌선생이 1591년 즉,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왜적이 침입할 것을 미리 예견(豫見)하시고, 충북 옥천에서 계시다가 도끼를 가지고 임금님께 상소하는 장면이다.
당시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전국을 통일한 여세(余 勢)로 명(明)나라를 정벌하겠다는 망상을 가지고 사신을 보내어 우리에게 길을 비키라는 교섭을 해왔다. 이때 나라에서는 국론이 분열되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으나, 위급한 나라의 앞날을 예견하신 조헌선생은 자기의 도끼로 왜국 사신의 목을 베고 국토방위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을 상소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헌선생은 자기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를 한탄하여 궁궐 주춧돌에 이마를 부딪쳐 유혈이 낭자했다.
그때에 많은 사람들은 조헌선생의 그 모습을 보고 비웃기까지 했다. 그러나 조헌선생은「내년 봄 너희들이 산골로 도망칠 때에는 나의 말을 알아들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옥천으로 돌아가 닥쳐올 국난을 근심하고 계셨다. 결국 다음 해 왜적은 15만여 명의 대군으로 우리 강토를 휩쓸었으며 7년간에 걸쳐 유례(類例)없는 민족의 수난을 겪게 되었다.
근왕창의도
근왕창의도 이미지
1592년 4월 왜적이 우리 강토를 짓밟고 쳐들어 올 때에 조헌선생과 그 제자들인 전승업(全承嶪), 이봉(李逢), 김절(金節), 김략(金簽), 박충검 (朴忠儉) 등이 옥천에서 분연히 궐기하여 5월 21일 열읍(列邑)에 격문을 띄우고, 국왕을 보위하고 강토를 수복할 의병을 모으고 있는 장면이다. 의병들이 창과 칼, 그리고 도끼, 낫, 쇠시랑 등의 농구를 들고 먼 마을에서 찾아와 수백명이 되었다. 여기에서 의(義)의 기치(旗幟) 밑에 뭉친 의병들은 북상하다가 차령에서 처음으로 왜적을 무찔렀다. 이때 충청도의 전황을 보면 왜적의 주력부대가 이미 옥천, 영동, 청주 를 거쳐서 서울로 북상한 후였으며, 청주에는 왜군의 수비부대가 남아 있었다. 조헌선생은 적의 배후에서 의병모집을 진행하였다.
토적맹약도
토적맹약도 이미지
1592년 7월 4일 조헌선생은 전에 제독관으로 있었던 공주(公州) 땅에서 1 천 6백여 명의 의군을 모아 왜적을 무찌르겠다고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맹세를 하였다.

그 다음날 조헌선생은 군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군령을 내렸다. 「우리는 서로 싸우지 말고, 태만하지 말고, 대열(隊列)에서 이탈하지 말고, 백성의 재물을 탐하지 말고, 적병을 두려워 하지말며 오직 국난만을 생각하여 진격할 것이다. 소리(小利)를 탐하지 말고 힘과 마음을 한가지로 하여 끝내 공훈을 남길 것이다. 마음과 힘이 한결같지 못하면 벌과 후회가 있을 뿐이니 오직 의(義)라는 한 글자만을 시종 염두에 두고 행할 것이다」라고 당부한 것이다.
전략회의도
전략회의도 이미지
충북 옥천에서 조헌선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의병과 공주 갑사에서 나라의 위급을 막고자 궐기한 영규대사의 승군은 1592년 7월에 합류하여 장차 다가올 격전에 대비, 일련의 전략회의를 거듭하였다.

조헌선생은 문과 출신인 선비이면서 군략면에서 상당한 식견을 지니고 있었다. 1591년 3월 15일 즉, 임진왜란 1년전에 선조대왕에게 올린 상소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귀가 있다.

1. 명장(名將)을 각 도에 배치하고, 정예한 병사를 뽑아 왜적의 선봉을 꺾어야 하며,
2. 토요토미의 선봉부대를 조방장(助防將)의 힘만으로 꺾을 수 없으며,
3. 왜적의 침입은 영남이 주가 될것이므로 그 방비를 강화하여야 할 것이고,
4. 왜적은 향도인을 앞세울 것이므로 먼 섬까지 나가 고기잡는 사람을 막아 포로가 되는 사람이 없게 할 것이며,
5. 훈련을 잘 받지 못한 우리의 군사를 가지고 평야지대에서 왜적과 맞서는 것은 승산이 없으며,
6. 왜적은 조령(鳥嶺)을 넘어올 것이므로,
7. 산악의 험한 곳에서 지리를 이용, 적을 방어하여야 할 것이며,
8. 강물을 이용, 적을 막고 활 쏘는 복병을 두었다가 적을 무찔러야 하겠다는 등의 놀랄만한 전략을 개진했던 것이다.
청주성탈환도
청주성탈환도 이미지
청주성은 원래 방어사(防禦使) 이옥(李沃)이 지키고 있었으나 갑자기 왜 군이 쳐들어 오자 그는 제대로 한번 싸우지도 못하고 성을 뺏기고 말았다. 청주성을 점거한 왜장 하치슈가(蜂須賀家政)는 본시 7천여 명의 병력 중 일부 병력으로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옥천에서 기병한 조헌선생은 김절(金節), 김략(金簽), 박충검(朴忠儉) 등 과 보은(報恩), 차령(車嶺)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충청도 서남지구에서 이광륜(李光輪), 장덕익(張德益), 신난수(申蘭秀), 고경우(高擎宇), 노응탁(盧應晫) 등의 군사가 조헌선생 깃발아래 모여들어 1천 6백명이 온양(溫陽), 회덕 (懷德) 등을 순무한 다음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병 1천여명과 합류하였으며 방어사 이옥의 군대 5백명도 진출, 1592년 8월 1일 청주성을 공력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의병들은 청주성 서문(西門)을 향하여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조헌선 생의 의병은 활, 칼, 창 등으로 무장하였고, 영규대사 휘하의 승병들은 선장(禪 丈), 낫, 그리고 도끼 등으로 무장하였는데, 왜적은 조총(鳥銃)으로 맞섰으나 비장한 결의로 돌격하는 의병 앞에 겁에 질려 성안으로 후퇴하였다. 조헌선생은 전군을 독전, 성곽을 오르게 하였는데 갑자기 강풍이 불며 서북쪽으로부터 소나기가 휘몰아쳐 군졸들은 더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조헌선생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승패(勝敗)는 천운(天運)에 달려 있다고 하더니 과연 그런가 보다」라고 말하면서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날 밤 왜적은 성중에 불을 놓고 기(旗)를 세웠다. 조헌선생은 왜군이 북문(北門)으로 빠져 나갈 것을 염려하여 방어사 이옥(李沃)에게 북문 밖에 복병(伏兵)을 배치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런데 이옥(李沃)은 병졸을 매복 시키지 않아 왜적은 그날 밤 어둠을 이용하여 북문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 청주성 탈환의 공으로 조헌선생은 종4품의 봉상시첨정(奉常侍僉正)의 벼슬을 담은 선조대왕의 교서가 8월 15일 내렸으며, 영규대사 또한 당상관 (堂上官)의 벼슬과 단의(段衣)가 내려졌다. 그러나 두분은 8월 18일 금산성 싸움에서 순절함으로써 그것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금산혈전출진도
금산혈전출진도 이미지
임진년 8월 16일 조헌선생과 영규대사가 금산의 왜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공주에서 유성(儒城)을 거쳐 금산으로 진격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때 칠백의사들이 청주성을 탈환한 소식은 호남, 호서에 퍼져나가 백성들의 사기는 높아졌고, 칠백의사를 우러러보며 아낙네들은 음료수와 음식까지 마련하여 바치기도 했다.


금산혈전순절도
금산혈전순절도 이미지
금산성을 지키고 있던 왜적은 그들의 제6군 고바야가와 다께가게(小早川隆 景)군으로 앙코쿠지(安國寺惠瓊)와 다치바나(立花統虎) 등이 지휘하고 있는 1 만 5천여 명의 막강한 부대였다. 이들은 1592년 6월 영동(永同)을 거쳐 금산에 침입, 장차 호남의 곡창(穀倉) 지대를 점거할 목적이었다. 또 6월 22일 금산군 제원면 개티에 다다르자, 당시 금산군수 권종(權悰)은 수백의 병력으로 이를 방 어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금산성을 점거한 왜적은 두 파로 갈라져 곰티와 배티를 넘어 전주에서 합류코자 기도하였다. 그러나 곰티에서는 김제군수 정담(鄭湛)의 완강한 저지를 받았고, 배티(梨峙)에서는 전라도 도절제사 권율의 반격으로 타격을 받았다. 그후 금산성 5리밖의 눈벌(臥平) 싸움에 고경명군을 물리치고 그들의 기세는 올라 있었으며, 남평 현감 한순(韓楯)이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다 가 전사한 후 아무도 금산의 적을 격멸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조헌선생은 의병 1천여 명을 이끌고 온양에서 북상하여 근왕(勤王) 코자 하였으나,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尹先覺)이 선생의 막하에 있던 장덕 익(張德益)을 불러 같이 금산의 적을 치자고 권유하고, 의군은 온양에서 공주로 되돌아왔다. 관군과 합력하여 금산의 왜적을 토벌코자 하였으나, 관군 과의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았으며 오히려 방해로 의병은 흩어져 오직 충의와 신의로 뭉친 칠백의사만 남게 되었다. 또한 전라관군에게 금산성 공격의 전기(戰期)를 알리고 같이 협공하자고 한 후, 15일 유성에 진출해 영규대사가 이끄는 수백명의 승군과 다시 합세 하여 진군하게 되었다. 칠백의사는 8월 17일 저녁, 왜적이 점거하고 있는 금산성 동쪽 10리밖 경양산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이때 조헌선생의 막좌들은「약세한 군으로 수가 많고 정예(精銳)한 왜적과 대결하는 것은 승산이 없으니 당분간 군대를 정비하고 정세를 관망해 가면서 나라의 명령을 기다려야 될 줄 압니다」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때 조헌선생은 눈물을 흘리면서「현재 임금께서 어떠한 처지에 계시는데 감히 전쟁터에서 이해를 따질 수 있겠는가, 임금이 변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니 오늘날 나는 한번 죽는다는것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하고 대답하였다. 또한 영규대사는「필패의 싸움에 참전할 필요가 없 다」고 반대하였으나 조헌선생의 충의에 감동되어 마침내 필사무퇴의 결의로 뭉쳐 적과 마주치게 되었다.

8월 18일 새벽, 왜적은 아군의 수효가 얼마되지 않고 후군이 없는 것을 탐지, 사방으로 포위하고 3대로 나누어 번갈아가면서 치열한 공격을 해왔 다. 이때 왜적은 조총 등으로 무장되어 있었으나 아군은 활과 칼, 그리고 창 과 농기구 등으로 적과 맞서게 되었다. 세번 공격해 온 적을 세번 다 무찔러 금산 벌판에는 인마(人馬)의 신음소 리가 천지를 진동하였고 선혈은 낭자하였다. 의병들은 전상을 입고도 다시 일어나 화살이 다하면 칼과 창을 잡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로 치는 처참 한 육박전이 전개되었다.

이날, 해가 질 무렵에 아군의 화살은 마침내 다하여 왜적은 마지막 총공격을 감행하여 우리의 장막(帳幕)에까지 침입하게 되었다. 이때 조헌의 막좌한 사람이 잠시 피하여 전열을 가다듬을 것을 종용하였으나, 「오늘의 사 태는 죽음 한 가지만이 있을 뿐이다. 죽든가 살든가, 앞으로 나아가든가 뒤로 물러서든간에 다만 의(義)라는 글자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더욱 독전하였다. 우리의 의사들은 그 명령에 복종할 뿐,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고 더욱더 용전 분투하였다.

영규대사는 장창과 낫으로 무장된 승병을 독려하면서「생사(生死)의 명(命)은 재천(在天)이다. 다만 의를 좇아 순(殉)할 뿐이다」라고 외치면서 구름같이 밀려오는 왜적을 무수히 무찔렀다. 한편 사태가 위급하자 조헌선생의 아들 완기는 아버지를 구하고자 화려 한 옷을 차려입고 적진에 돌입하였다. 이때 왜군은 그를 아군의 대장으로 오인, 집중공격을 가해와 마침내 그 시체가 찢기는 참사가 벌어졌다. 조헌선생의 막하 이광륜(李光輪), 임정식(任廷式), 이려(李勵), 곽자방 (槨自防) 등은 저마다의 능력을 다하여 진종일 분전하였으며, 칠백의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한 사람도 대열에서 벗어나거나 후퇴함이 없이 적을 무수히 무찌르고 전원이 옥쇄하고 말았다.

싸움이 끝난 후 적은 그들의 시체를 3일 동안이나 걸리어 운반, 불태워 버리고 영남지방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칠백의사의 장렬한 최후의 소식이 호남, 호서지방에 전해지자 칠백의사의 유족들은 자기 부형이나 자식을 잃은 것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앞으로는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나갈 것인가」한탄하면서 조헌선생의 순절을 슬퍼하였다. 그리고 화를 면한 사람들까지 칠백의사와 함께 출전하지 못하였음을 통탄하고 오랫동안 소식(素食)을 하며 칠백의사들의 순절을 애도하였다. 조헌선생의 아우 범(範)은 싸움이 끝난 다음날 죽음을 무릅쓰고 싸움터 에 나가 조헌선생의 시체를 수습하였는데, 조헌은 장기(將旗) 밑에서 운명 하였고, 장졸들은 그를 에워싸 전사하고 있었으니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조헌선생의 장례는 4일만에 치렀는데 그 얼굴빛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과 같았고, 눈을 부릅뜨고 턱을 들어 수염이 치올라 있어서 죽어서까지 왜 적의 박멸(樸滅)을 지휘하는듯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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